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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과 대들보 – 집의 뼈대에 깃든 신앙

by 유익한스토리 2025. 9. 16.

집은 단순한 거처가 아니다

사람에게 집은 단순히 비바람을 피하는 공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 인간의 생애와 가문의 역사가 깃드는 뼈대이며, 삶과 죽음이 함께 어우러지는 신성한 그릇입니다. 제가 이전에 쓴 죽음과 장례 – 조상과 산 자를 잇는 의례 글에서도 다룬 것처럼, 인간은 죽음을 맞이할 때조차 집이라는 공간을 매개로 조상과 후손, 산 자와 죽은 자를 이어왔습니다. 집은 단순히 생활의 무대가 아니라, 생명의 시작과 마무리, 그리고 세대를 관통하는 영적 통로였던 셈입니다. 그 중심에는 기둥과 대들보가 있습니다. 기둥은 집을 떠받치는 힘줄이자 뿌리이고, 대들보는 집의 하늘을 지탱하는 뼈대입니다. 구조적으로는 지붕을 지탱하는 건축적 요소이지만, 민속 신앙에서는 하늘과 땅, 인간과 신을 이어주는 신성한 축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집을 짓는 과정에서 기둥과 대들보는 단순히 나무를 세우는 행위가 아니라, 의례와 주술이 결합된 거대한 상징 행위였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상량식(上樑式)이라 불리는 대들보 올림 의례, 집 짓기 과정에서의 금기와 축원, 그리고 대들보에 새겨진 상징 문양들까지 살펴보며, 우리 조상들이 집이라는 공간에 어떻게 신성과 길흉화복의 의미를 불어넣었는지 탐구하며 살펴보도록 합니다.

기둥과 대들보 – 집의 뼈대에 깃든 신앙
기둥과 대들보 – 집의 뼈대에 깃든 신앙

 

1. 상량식(上樑式)의 의례 – 대들보에 올리는 기원의 글

상량식은 집을 짓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절차 중 하나였습니다. 기둥과 벽체가 세워지고 마지막으로 대들보를 얹는 순간, 집의 완성을 알리는 동시에 새로운 생활의 시작을 선언하는 제의가 치러졌습니다. 이때 목수는 대들보에 상량문(上樑文)을 써 붙였습니다. 상량문은 단순히 “이 집이 무사히 완공되기를” 기원하는 글이 아니라, 집주인의 이름과 조상의 위계를 기록하고, 집이 세워진 연월일을 남기며, 집안의 번영과 후손의 번창을 바라는 구체적 기원까지 담았습니다.

예컨대 상량문에는 다음과 같은 형식이 자주 보였습니다.

“천지신명께 고하노니, 이 집을 바람과 비가 지켜 주소서.”

“이 기둥은 만년토록 굳세고, 이 대들보는 천년토록 꺾이지 말라.”

“후손이 번창하고, 손님이 끊이지 않으며, 병마와 재앙이 들지 않게 하소서.”

이렇듯 상량식은 단순한 건축 절차가 아니라, 집을 영적인 생명체로 인정하고 그 뼈대를 신에게 바치는 의례였습니다. 목수와 집주인,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술과 음식을 나누며 기원을 올린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이었습니다.

1-1 축문과 제물

상량식 때는 대들보 위에 곡식, 술, 고기, 과일 같은 제물을 올리고 축문을 읽었습니다. 축문에는 집안의 번영, 자손의 번식, 질병과 재해로부터의 보호가 담겨 있었습니다.

1-2 부적과 돈

또한 대들보 틈에 붉은 글씨의 부적이나 동전을 넣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는 집안에 복이 깃들고 재물이 모여들기를 기원하는 행위였습니다. 동전은 오행을 상징하거나 잡귀를 막는 힘을 가진다고 믿었습니다.

1-3 공동체적 의미

상량식은 단순히 집주인의 일만이 아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돕고 잔치를 벌이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집은 개인의 것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와 연결된 공간이었기에, 새 집의 탄생은 마을 전체의 기쁨이었습니다.

 

2. 집 짓기 과정에서의 금기와 축원 – 기둥에 얽힌 두려움과 바람

기둥은 집의 무게를 떠받치는 존재인 만큼, 그 상징성도 무겁게 다뤄졌습니다. 특히 첫 번째 기둥(초주, 初柱)을 세우는 날은 집안 운명을 좌우한다고 여겨, 함부로 날짜를 정하지 않았습니다. 길일(吉日)을 택일하고, 금줄을 치거나 삼베로 감싸 잡귀가 붙지 못하게 했습니다.

또한 기둥을 세울 때는 절대 화를 내거나 나쁜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습니다. 누군가 욕설을 하거나 불길한 징조가 나타나면, 기둥을 다시 세워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이는 기둥이 곧 집주인과 가문의 운명과 동일시되었기 때문입니다.

축원의 의미는 대들보에서도 이어졌습니다. 대들보는 집의 중심축이자 하늘을 떠받치는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대들보에는 ‘龍(용)’, ‘龜(거북)’, ‘鶴(학)’ 같은 장수와 복을 상징하는 문양을 새기거나, 꽃과 덩굴무늬를 그려 넣어 생명의 지속을 기원했습니다. 이러한 문양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집에 깃든 보이지 않는 신령과의 소통 수단이었습니다.

2-1 택일(擇日)과 길일(吉日)

기둥을 세우거나 대들보를 올리는 날은 반드시 택일을 통해 정했습니다. 길하지 않은 날에 기둥을 세우면 집안에 병이 들거나, 대들보를 올리면 화재가 난다고 여겼습니다.

2-2 피를 흘리지 않는 규범

집 짓는 과정에서는 ‘피를 흘리면 집이 흉해진다’는 금기가 있었습니다. 목수가 다치거나 가축을 잡아 피가 흘러내리면 흉조로 보았고, 반드시 제사를 지내거나 부적으로 막았습니다.

2-3 기둥 세우기의 신성

기둥은 집의 뿌리이자 신이 깃드는 자리였습니다. 기둥 밑에 곡식이나 동전을 묻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풍요 기원의 행위가 아니라, 집터의 신과 연결을 맺는 주술적 의례였습니다.

 

3. 대들보에 새겨진 상징 문양들 – 장수·부귀·조화를 새기다

전통 가옥에서 대들보와 기둥에 새겨진 문양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위한 장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집과 사람을 지키는 일종의 ‘부적’이자 ‘서약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대들보에 거북 문양이 새겨져 있으면 가문의 장수와 안정이 약속된다고 믿었고, 학 문양은 정신적 고결함과 함께 신선세계와의 연결을 의미했습니다. 용 문양은 권위와 보호의 상징으로, 대들보가 마치 하늘로 치솟는 용처럼 집을 드높여 준다는 믿음을 담았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문양들이 마을 공동체 내에서도 특정한 의미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어떤 집에서 특정 문양을 새기면, 이웃들은 그 집이 어떤 기원을 중시하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곧 마을 사람들 사이의 묵시적 약속이자 공동체적 연대의 표시로 기능했습니다.

3-1 용과 봉황

용은 하늘과 물을 다스리는 신령한 존재로, 집안에 권위와 번영을 불러온다고 믿었습니다. 봉황은 태평성대를 상징하며, 가정의 평화와 화합을 기원하는 의미로 새겨졌습니다.

3-2 거북과 학

거북은 장수를, 학은 고고한 삶과 영생을 상징했습니다. 집안의 어른이 오래 살고 자손이 번성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겼습니다.

3-3 글귀와 가훈

어떤 집에서는 대들보에 ‘수복강녕(壽福康寧)’,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같은 글귀를 써 넣었습니다. 이는 집 자체가 부적이자 기원문으로 기능했음을 보여줍니다.

 

4. 현대 건축에서 남은 흔적 – 상량문과 기둥의 의미 재해석

오늘날 아파트나 철근콘크리트 건물이 주류가 된 시대에도 상량식과 대들보의 기억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집을 신축할 때 상량문을 작성해 건물의 구조물 속에 봉안하는 풍습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전통 한옥을 짓는 과정에서는 상량식이 다시 복원되며, 관광지나 문화재 복원 현장에서도 이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현대인들은 대들보와 기둥의 신앙적 의미를 직접적으로 이어받지는 않지만, 여전히 집을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가족의 안식처이자 정신적 기둥’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가정의 기둥”, “집안을 떠받치는 대들보” 같은 표현은 그 잔재가 일상 언어 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음을 보여줍니다.

4-1 아파트 입주식

새 집에 들어갈 때 돼지머리를 차리고 고사를 지내는 풍습은 상량식의 현대적 변형입니다. 잡귀를 쫓고 집의 안녕을 비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4-2 건축 현장의 고사

현대 건설 현장에서도 공사 시작이나 주요 단계에서 고사를 지냅니다. 이는 집이나 건물이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직결되는 신성한 공간이라는 전통 인식이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5. 집의 뼈대에 깃든 신앙, 공동체의 유산

기둥과 대들보는 단순한 구조적 요소를 넘어선 신앙적 상징이었습니다. 그것은 집의 운명과 가문의 안녕을 함께 지탱하는 존재였으며, 집을 지은 사람들의 두려움과 염원, 그리고 공동체의 연대를 함께 담아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상량식을 일상적으로 행하지 않지만, 기둥과 대들보에 담긴 신앙은 여전히 우리 문화 속에 은밀히 살아 있습니다.

이전 글에서 다루었던 장독대와 부엌, 아궁이에 깃든 신앙이 집안 내부의 생활공간에 집중되었다면, 이번 글에서 살펴본 기둥과 대들보는 집을 지탱하는 구조적 뼈대에 신앙이 깃들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집이라는 공간이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믿음을 한데 묶어내는 살아 있는 유기체였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