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에서는 지금은 찾아볼수 없는 사라져가는 손기술인 칼갈이에 대한 글을 작성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거리에서 만난 칼갈이 장인 - 쇠 부딪히는 소리의 의미
시골 읍내 시장 끝자락, 오래된 전봇대 아래.
그곳엔 늘 구부정한 허리의 노인이 앉아 있다. 그의 앞에는 작동감이 투박한 연마기와 손에 익은 숫돌 몇 개, 그리고 작은 간이 간판 하나. '칼 갈아요. 낫도 됩니다.'
나는 어릴 적 외할머니가 손에 들고 갔던 그 부엌칼을 떠올리며 조심스레 다가갔다.
“이거 좀 갈아주시겠어요?”
내가 내민 주방용 칼을 받아든 그의 손은 단단했고, 움직임은 거침이 없었다. 칼날을 눈으로 훑어보더니 한마디 한다.
“이건... 꽤 오래 쓴 칼이네. 이 정도면 아직 좋아. 다만, 한 번쯤 숨을 쉬게 해줘야지.”
숨을 쉬게 한다는 말이 인상 깊었다. 그에겐 칼이 단순한 도구가 아니었다. 매일 무언가를 자르고 베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연장선이자, 고된 시간의 흔적이었다.
장인은 평생 칼을 갈아왔다. 40년 전, 그 역시 시장에 나가 칼을 갈던 스승에게 기술을 배웠고, 그렇게 한 자리에서 세월을 갈았다. 요즘은 찾아오는 손님도 뜸하지만, 그는 여전히 숫돌을 곁에 두고 산다.
“기술이라는 건 말이야, 날카로움보다 무뎌지지 않게 하는 게 더 중요해.”
그 말이 왠지 사람에게도 해당되는 것 같았다.
숫돌의 결, 손의 감각 - 장인이 느끼는 ‘갈림’의 미학
칼을 가는 데 필요한 도구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숫돌, 물, 그리고 두 손. 하지만 그 안에 깃든 감각은 누구나 흉내 낼 수 없다.
장인은 네 개의 숫돌을 사용했다. 거친 입자의 200번대 숫돌에서 시작해, 점차 1,000번, 3,000번, 마지막엔 8,000번의 곱고 섬세한 숫돌로 마무리한다. 칼날에 점점 더 정교한 날을 입히는 과정이다.
“갈 때, 칼이 숫돌 위에서 미끄러지는 느낌을 잘 봐야 해. 너무 거칠게 가면 칼이 상하고, 너무 얕으면 날이 안 서지.”
그는 손가락 끝으로 칼날을 문질러가며 감각을 확인했다. 실제로 그는 ‘손끝으로 칼의 컨디션을 듣는다’고 말한다.
연마 중 물을 뿌리면 숫돌 위에 뿌연 갈림 자국이 생긴다. 장인은 그것을 보며 ‘칼의 피’라고 부른다. 그 피가 곱게 퍼질수록, 칼날은 잘 깎이고 있다는 증거다.
그가 내 칼을 갈면서 내게 물었다.
“이 칼, 누가 주방에서 써? 많이 무뎌졌더라고.”
“어머니가 쓰세요. 거의 20년 넘게요.”
“그럼 이 칼도 많이 안다. 어머니 손맛이 다 묻어 있을 거야.”
그 말이 괜히 뭉클했다. 칼은 도구였지만, 그 손을 거친 세월과 정성은 숫돌 위에서도 녹아내리고 있었다.
칼날 속 시간의 조각들 - 장인이 기억하는 손님들의 이야기
칼갈이 장인의 이야기는 결국 ‘사람의 이야기’다. 그는 기억에 남는 손님이 많다고 했다.
“한 번은 낫을 들고 온 할머니가 있었어. 농사 접은 지 오래인데, 마지막으로 갈아두고 싶다더라고. 자식에게 물려줄 것도 없고, 그 낫이라도 정리해두고 싶다면서.”
또 어떤 날은 젊은 요리사가 셰프용 칼을 들고 찾아왔다. 주방에서 열심히 일하지만 칼이 잘 안 들어 고민이라는 그에게, 장인은 직접 갈아주며 손에 맞게 날을 다듬어줬다.
“그 젊은 친구, 두 달 뒤에 다시 왔더라고. 칼이 너무 잘 든다면서. 그러면서 식당도 잘 된대.”
장인은 웃었지만, 눈가에는 미세한 뿌듯함이 스며 있었다.
그에게 칼을 맡긴 사람들은 대부분 다시 찾아온다고 한다. 칼이 잘 들어서가 아니다. 그 칼에 깃든 정성과 손길이, 삶의 한 조각을 기억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사라져가는 기술, 기억해야 할 손끝
지금은 편의점에서도 새 칼을 쉽게 살 수 있다. 전기 칼갈이나 자동 연마기도 흔하다. 하지만 숫돌 위에서 천천히, 조용히 칼을 갈던 그 손의 리듬은 대체되지 않는다.
쇠 부딪히는 소리, 물기 머금은 칼날, 손끝에 스며드는 감각. 이것은 오직 장인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내공의 산물이다.
칼을 갈며 살아온 그의 삶은 결국, 남의 칼을 빛내주는 인생이었다. 그 자신은 늘 그림자였지만, 그의 손끝에서 날 선 칼들은 빛났다.
우리도 언젠가 무뎌질 때, 조용히 갈아주는 손길 하나쯤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