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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말의 실종 – 사투리 단어가 사라진 이유

by 유익한스토리 2025. 6. 24.

“그 말, 요즘은 잘 안 쓰더라.”
어르신들이 문득 꺼내는 낯선 단어 속에는 과거가 숨겨져 있다. 우리는 왜, 어떻게 지역의 말들을 잃어가고 있을까? 사투리 단어의 감소는 단순한 세대 차이가 아니라, 한국 현대사 속 사회 정책과 문화 환경의 직접적인 결과물이다.

이 글에서는 일제강점기부터 현대까지 사투리의 위축 과정, 특히 국가의 언어 정책과 방송·미디어의 영향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말을 보면 시대가 보인다. 말이 사라지면, 시대도 지워진다.

사투리 단어가 사라진 이유
사투리 단어가 사라진 이유

사라짐의 시작: 일제강점기 언어 탄압과 말의 침묵

사투리 단어의 대규모 소실은 사실상 일제강점기의 강제적 언어 통제부터 시작되었다. 일제는 조선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언어의 통일’을 이용했고, 그 결과 조선어 자체가 억압받는 동시에 지역어 역시 철저히 말살당했다.

일제강점기의 언어정책 주요 흐름

1911년 이후 조선어 교육 축소: ‘국어(일본어)’만을 공식 언어로 지정, 학교에서는 조선어 교육이 점차 폐지됨.

1938년 이후 ‘국어 상용령’ 시행: 공공기관, 학교, 매체에서 일본어만 사용하게 하는 법령 도입.

말투의 획일화 유도: 일본식 어순과 단어 사용을 강요하며, 지역마다 다르던 조선어 말투의 개성을 제거함.

이 시기에는 사투리 단어가 단순히 '촌스럽다'가 아니라, 위험하거나 금기시되는 것이었다. 언어는 일제의 통치 도구였고, 사투리는 그 안에서 더욱 설 자리를 잃어갔다. 이 시기 말의 변화는 ‘표준화’가 아니라 ‘침묵의 강요’였다.

해방 이후~산업화 시대: 표준어의 정착과 사투리의 후퇴

1945년 해방 이후, 한국은 ‘국어’에 대한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표준어 제정’ 작업을 본격화한다. 이는 민족 정체성 회복의 일환이자, 국민 통합의 수단으로 추진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지방의 사투리는 점차 ‘비표준’, ‘잘못된 말’로 낙인찍히기 시작한다.

1988년 개정 ‘표준어 규정’과 그 영향

표준어 중심 교육: 초·중·고 교과 과정에서 철저히 표준어만 가르침. 사투리는 구술평가에서 감점 요소로 작용함.

공중파 방송 정책: 1980년대까지 지상파 방송에서는 사투리 사용을 금지하거나 교정 요구.

도시화로 인한 언어 이동: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이 사투리를 숨기고 표준어에 적응함.

이처럼 국가가 ‘표준어’를 우대하면서 사투리는 점점 입지가 줄어들었다. 심지어 일부 교사나 방송인은 사투리를 교정 대상으로 삼으며, 그것이 잘못된 말인 양 가르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지역 단어, 고유 표현, 속담, 감탄사 등이 쓰이지 않게 되었다.

1980~90년대는 말의 획일화가 가속화된 시대였다. ‘서울말 = 교양 있는 말’이라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퍼졌다.

매체와 통신의 시대: ‘전국 언어’의 탄생과 사투리의 상품화

2000년대 이후, 전국에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지역 간 언어 장벽은 급격히 무너졌다. 유튜브, 틱톡,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은 전국의 10대들이 같은 신조어를 쓰고, 같은 밈으로 웃게 만든다. 이로 인해 사투리 단어는 더욱 설 자리를 잃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투리는 또 다른 방식으로 살아남았다—바로 콘텐츠화, 캐릭터화, 상품화된 언어로서 말이다.

21세기 매체 속 사투리의 두 얼굴

실제 언어로서의 퇴화: 일상 대화에서 사투리 단어 사용률은 젊은 세대일수록 급감.

콘텐츠 속 캐릭터화: 드라마 속 “아따 마이 묵었다 아이가~”는 웃음을 위한 도구로 재사용됨.

관광 상품화: 제주도의 “혼저 옵서예”, 경상도의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 등은 실제 쓰이지 않지만 기념품 문구로 인기.

즉, 말은 더 이상 살아있는 생활어가 아니라, 지역을 상징하는 브랜드처럼 남게 된 것이다.

표준어 중심 문화는 여전히 강세지만, 사투리는 ‘보여주기용 언어’로 탈바꿈해 콘텐츠에서 생명력을 얻고 있다.

 

말이 사라지면 삶의 결도 흐려진다

사투리 단어는 단순한 언어가 아니다. 그 안에는 지역의 풍경, 사고방식, 인간관계의 거리감, 정서의 리듬이 담겨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근현대사의 굵직한 흐름 속에서 이 소중한 말들을 너무 많이, 너무 쉽게 잃어버렸다.

표준어가 우리를 하나로 만들었다면, 사투리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기억하게 해주는 언어다. 이제는 지역 말의 소멸을 단순한 언어 변화로 보지 않고, 역사적 맥락 속에서 반성하고 되살려야 할 문화유산으로 바라봐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