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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촌이 된 마을의 최후 – 사람 없이 남은 공간의 기록

by 유익한스토리 2025. 6. 28.

지도로는 존재하지만, 실제로 가 보면 사람 한 명 없는 마을. 굳게 잠긴 대문, 녹슨 우체통, 덩굴에 덮인 창문들. ‘폐촌’은 단지 행정 용어가 아니라, 한 시대가 사라졌다는 조용한 알림이다.

한국에는 1990년대 이후 가속화된 고령화와 도시 집중화의 여파로, 주민이 모두 떠나 문을 닫은 폐촌(廢村)이 수십 곳 이상 존재한다. 이 마을들에는 여전히 이름이 있고, 주소도 있지만, 정작 사람은 살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 마을이 언제 사라졌는지도 모른 채” 그 자리를 지나치고, 또 누군가는 그곳에 남아 마지막 주민으로 몇 해를 버티다 떠나간다.

이 글에서는 실제 폐촌 사례를 바탕으로, 사람이 사라진 마을이 어떻게 기억되고 있고, 무엇이 지워졌으며, 무엇이 남았는지를 기록해보려 한다. 폐촌은 사라진 공간이 아니라, 기록되어야 할 삶의 단위다.

폐촌이 된 마을의 최후 – 사람 없이 남은 공간의 기록
폐촌이 된 마을의 최후 – 사람 없이 남은 공간의 기록

마을이 사라지는 조건 – 인구 0의 풍경

폐촌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농촌 공동체가 해체되기까지는 수십 년에 걸친 복합적인 변수가 작용한다.
대표적인 원인은 다음과 같다.

고령화와 청년 이탈: 젊은 세대의 도시 이주, 고령자만 남은 마을

지리적 고립: 산간·도서 지역 등 교통 불편으로 외부 접근성 부족

행정적 통합: 주소 체계 통합, 마을 통폐합으로 인한 소멸 가속화

생활 인프라 미비: 상수도, 병원, 상점 등이 없어 자급자족 불가능

예를 들어 강원도 태백의 일부 탄광 마을은 광산 폐쇄 이후 주민 대다수가 빠져나갔고, 전북 진안이나 경북 봉화의 산간 마을은 도로 정비에서 배제되며 자연스레 사람의 발길이 끊겼다.

2000년대 중반 이후로는 ‘인구 0명’ 마을이 지자체 공식 통계에조차 누락되기 시작했다. 일부 마을은 행정적으로만 살아 있고, 실질적으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 마을이 완전히 사라지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리지만, 흔적이 사라지는 데는 그보다 짧다. 집은 붕괴되고, 논밭은 잡초로 덮이며, 이름마저 사라진다. 그리고 그 자리는 ‘그냥 산길 어귀’로 치부된다.

마지막 주민 – 떠나지 못한 사람들, 끝내 떠난 사람들

폐촌에는 마지막까지 떠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대개는 고령의 노인들이다. 그들은 물류가 끊기고, 방문객이 줄어드는 현실 속에서도 “여기가 내 고향이니까”라는 이유로 머물렀다.

예를 들어 경남 하동군의 덕천리, 강원도 평창의 운교리, 전북 순창의 야산리 등은 2000년대 들어 한두 명의 노인이 마을을 지키다, 결국 2010년 전후로 모두 떠나거나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종종 지역 언론의 기사 한 줄로 기록되거나, 탐방 다큐멘터리의 장면 일부로 남았다.

한 할머니는 폐가 옆 나무 아래 작은 평상을 놓고 “여기서 꽃 피면, 예전 마을 생각난다”며 기자에게 말했다. 그녀는 그 다음 해에 요양병원으로 옮겨졌고, 그 집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졌다.
그런 이야기는 뉴스로는 짧지만, 현실에서는 긴 ‘작별’이다.

이들 마지막 주민은 마을 자체의 역사 구술자이기도 하다. 가정의 제사, 마을의 설화, 과거의 추석 풍경 같은 생활사가 그들의 기억에만 남아 있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구술 채록이 진행되지 않은 채 시간이 지나면, 그 기록은 사라진다. 건물보다 더 먼저 사라지는 건 바로 ‘이야기’다.

사라진 마을, 지워진 지도 – 그리고 현재의 흔적들

사람이 떠난 마을에는 몇 가지 흔적만이 남는다. 낡은 비석, 무너진 창틀, 고목나무, 마을회관 터. 이런 것들은 일종의 ‘물리적 기억 장치’이지만, 제대로 보존되거나 안내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부 폐촌은 귀농·귀촌인의 재정착 또는 예술가들의 레지던시 공간으로 간헐적으로 부활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지속되기 어렵고, 원래 마을의 서사와는 무관한 새로운 맥락에서 재탄생하는 경우가 많다. 폐촌의 기록을 보존하는 시도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가능하다.

지자체 및 마을기록단 운영: 구술 채록, 마을지도 제작, 아카이브 전시

문화재청·도서관 협력사업: 소멸 위기 지역의 구역별 데이터베이스화

디지털 지도 서비스와의 연계: 구글맵·카카오맵에 과거 마을 경계 추가

SNS·유튜브 다큐 기록화: 젊은 세대의 재해석과 시청각 기록 보존

특히 1세대가 떠난 공간에 3세대가 찾아와 그 흔적을 다큐로 남기는 경우, 마을의 이야기는 재해석되며 새로운 생명을 얻기도 한다.

예를 들어, 유튜브 채널 ‘사라진 마을을 찾아서’에서는 1970년대 폐촌된 충남 예산의 한 마을을 추적하며, 비석의 표기, 옛 지번, 주민등록 통합 기록까지 정리해낸다. 이것은 단지 영상 콘텐츠가 아니라 비어 있는 지역의 복원적 서사다.

 

‘없어진’ 마을이 아니라 ‘기억되어야 할’ 마을

폐촌은 단순히 인구가 사라진 곳이 아니다. 그곳은 누군가의 유년기였고, 누군가의 생계였으며, 누군가의 영정 사진이 찍힌 배경이기도 하다. 우리가 ‘사라졌다’고 말하는 그 순간에도, 마을은 아직 풍경 속에, 지명 속에, 누군가의 이야기 속에 존재한다. 단지 보이지 않을 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보이게 만드는 일’이다. 폐촌을 찾고, 기록하고, 남기는 것은 단지 과거를 추억하는 일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성찰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도시화의 그늘, 고령화의 속도,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을 되짚는 거울이 폐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묻는다.
“사라진 마을이 우리에게 남긴 질문은 무엇인가?”

그 질문을 놓지 않는 한, 마을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