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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서 지워진 행정구역 – 통합되고 흡수된 동네의 정체성에 대하여

by 유익한스토리 2025. 6. 28.

도로는 그대로인데, 동네 이름이 사라졌다. 주소는 남아 있어도, 더는 그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어떤 마을들은 행정구역 개편이라는 이름 아래 지도에서 삭제되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읍·면·동 단위의 통합 작업은, 효율적인 행정 운영과 재정 절감을 목적으로 추진되었다. 특히 도시 외곽이나 농어촌 지역은 인구 감소로 독립적인 행정단위 유지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고, 이에 따라 많은 동네들이 다른 지역에 흡수되거나 명칭을 잃은 채 통합되었다.
그러나 한 지역의 이름은 단순한 지리적 표식이 아니다. 그것은 정체성과 역사, 기억의 단위다. 이름이 사라진다는 것은 곧 그 지역의 정체성과 삶의 흔적이 희미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번 글에서는 1990~2000년대 한국의 행정구역 통폐합 사례들을 살펴보고, 그 변화 속에서 주민들의 정체성 변화, 사라진 이름의 흔적들, 기록과 복원의 시도를 함께 살펴본다.

지도에서 지워진 행정구역 – 통합되고 흡수된 동네의 정체성에 대하여
지도에서 지워진 행정구역 – 통합되고 흡수된 동네의 정체성에 대하여

통합과 소멸 – 지도에서 사라진 이름들

1995년을 전후해, 전국적으로 행정구역 재편이 시작되었다. 당시 정부는 도농통합시 정책을 통해 인구 10만 명 미만의 군 단위를 시와 통합하거나, 읍·면·동의 명칭을 정리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대표적인 사례

경기도 부천시: 과거 오정구, 소사구, 원미구로 나뉘었던 지역이 2016년 통합되어 ‘구 없는 부천시’가 되었고, 동시에 ‘도당동’, ‘약대동’ 등 개별 동의 역사성도 희미해졌다.

대전광역시 유성구: 유성군에서 유성시로, 다시 대전광역시에 편입되는 동안 원촌, 구암, 반석 등의 면 단위 지명이 일부 사라지거나 행정동명에 통합되었다.

충남 금산군: 금산읍 내 일부 리 단위가 통합되면서 ‘신촌리’, ‘문정리’ 등의 지명이 행정 문서에서 사라졌다.

이러한 변화는 주민에게 종종 이름을 뺏긴 듯한 허전함을 남긴다.
예를 들어, 전북 정읍시에서는 ‘북면’이 ‘정읍시 북면’으로 바뀌며 도시 행정에 통합되었고, 지역 주민들은 “정읍시민이라 불리는 건 싫지 않지만, 북면 사람이라는 말도 잊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행정적으로는 ‘합리화’이지만, 문화적으로는 ‘소멸’에 가까운 변화인 셈이다.

주민의 정체성 변화 – ‘동네의 이름은 우리였어요’

지역 이름은 단지 주소에 쓰이는 문자가 아니다. 그것은 주민들이 자신을 어떻게 규정하고, 어떤 공동체 안에서 살아왔는지를 나타내는 정체성의 표상이다. 이름이 바뀌는 순간, 그 이름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정체성도 흔들린다.

이름이 바뀐 이후의 변화들

지역 커뮤니티의 해체: 새 주소 체계에 익숙해지지 못한 주민들이 예전 동네 이름을 고집하면서 행정과 소통 단절 발생

학교·기관의 명칭 변경: ‘○○초등학교’가 아닌 ‘△△분교’, ‘통합학교’로 바뀌며 지역 자부심 저하

정주 의식 약화: “여기가 어디냐”는 질문에 설명이 길어지고, 타지역과의 경계 인식이 흐려짐

예를 들어, 부산 금정구의 ‘구서동’ 일대가 통합되면서 소규모 마을 이름이 행정상 사라졌는데, 주민들은 “지도에 없지만, 우리는 여전히 ‘서동골’ 사람”이라 말한다.
즉, 행정구역은 바뀌었지만, 주민의 인식 속에서 과거 동네의 정체성은 여전히 살아 있는 또 다른 ‘심리적 구역’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정체성을 잃은 동네는 문화행사, 마을 축제, 사투리, 지역 구비전승 등 생활문화의 층위에서도 단절을 겪게 된다. 이름이 사라지면 곧 이야기와 기억도 사라진다.

표지석과 지도 기록 – 사라진 이름을 기억하는 법

다행히 최근에는 행정통합으로 사라진 지역 명칭을 기록하고 기념하려는 움직임도 늘고 있다.

대표적인 ‘이름 보존’ 시도들

표지석 설치: 사라진 마을 입구나 옛 관청 자리에 ‘○○면청 소재지’라는 표지석을 세워 역사적 존재를 남김
예: 전남 곡성군 ‘입면면사무소 터’, 대구 동구 ‘봉무면 터’

구주소 표기 병행: 일부 지역에서는 도로명주소 하단에 구주소(지번 주소)를 병기해 주민 혼란을 줄이고, 과거 지명 인식을 유지

지역사 아카이브 구축: 지자체와 지역문화재단이 협력해 사라진 읍·면·동의 문서, 사진, 지도, 영상 등 기록물을 디지털화
예: 충북 영동군, 전북 남원시 등에서는 소멸 읍면단위 주민들 구술채록 사업을 진행 중

학교 이름 보존 운동: 폐교되거나 합병된 학교의 명칭을 교내 공간, 교정 비석, 졸업기념물 등으로 남기는 작업

그 외에도 ‘옛 지명 알리기 운동’, SNS를 통한 지역 명칭 복원 캠페인, 지도 앱에 과거 지명 병기 요청 등의 디지털 기반 움직임도 활발해지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단지 ‘그 시절이 좋았지’식의 향수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공동체가 자신들의 뿌리를 잊지 않기 위한 저항이자, 기억을 지키는 운동이다.

 

사라진 동네 이름이 남긴 질문

1990~2000년대의 행정구역 통합은 국가적 관점에서 보면 성공적인 행정 효율화였다. 그러나 지역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때로 공간의 정체성을 잃는 손실이기도 했다. 우리는 이제 ‘사라진 이름’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이름이 없어졌다고 해서 그 동네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곳에 여전히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들이 만들어 온 기억, 그 이름을 여전히 부르는 목소리가 존재한다면, 그 지역은 살아 있다. 지도에서 사라졌지만, 마음 속에서는 여전히 존재하는 동네들.
그 이름을 다시 꺼내 묻는 일, “당신의 동네 이름은 무엇이었나요?” 그 질문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지켜야 할 지역 정체성의 출발점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