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처럼 잔잔한 물 아래, 누군가의 고향이 잠겨 있다. 지금은 물 위로 배가 떠다니고 관광객이 사진을 찍는 그곳에, 한때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렸고, 봄이면 논두렁에 꽃이 피었으며, 제삿날이면 마을 전체가 분주했다. 수몰지역은 이름 그대로 물에 잠긴 마을이다. 대부분은 댐 건설이라는 국가적 대의명분 아래 이루어졌다. 농업용수 확보, 전력 생산, 홍수 조절이라는 이유로 수십 개의 마을이 지도에서 지워졌다. 그들은 강을 따라 살았고, 결국 그 강에 묻혔다.
이번 글에서는 한국의 대표적인 수몰지역 사례를 통해 물에 잠긴 마을의 전후 풍경, 사라진 공동체의 기억, 그리고 기록과 추모의 방식을 살펴보려 한다. 지금은 다리 아래, 댐 아래 묻힌 그 마을들은 결코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그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물에 잠긴 삶 – 댐 건설과 수몰 마을의 역사
한국에서 대규모 댐 건설이 본격화된 시점은 1970년대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함께 농촌의 근대화와 산업화 기반 조성이라는 국가적 명목 아래, 수많은 마을이 ‘수몰 예정지’로 지정되었다.
대표적인 수몰 사례: 충주댐 (충북 충주)
1985년 완공된 다목적댐. 충주호가 만들어지면서 5개 읍·면, 52개 마을, 7,000여 명이 고향을 잃었다.
수몰 전 주민들은 이주 보상금과 함께 전북 장수, 충남 예산 등지로 흩어졌다. 지금은 관광지로 개발된 충주호 수면 아래, 온 마을의 삶이 묻혀 있다.
밀양댐 (경남 밀양)
2001년 준공. 댐 건설로 인해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일대 5개 마을이 수몰되었으며, 주민들은 마을회관도 없이 급히 신축된 ‘이주단지’로 옮겨졌다.
당시 이주민 대부분이 고령층이었고, 농업 재개가 어려워 생계에 큰 타격을 입었다.
이 외에도 안동댐, 대청댐, 합천댐, 임하댐, 주암댐 등 전국에 걸쳐 수몰지구는 약 300여 곳에 달한다.
공통된 특징은, 수몰 마을 주민들이 충분한 사전 설명 없이 갑작스러운 강제 이주를 경험했고, 그 과정에서 공동체의 붕괴를 겪었다는 점이다.
댐 건설은 국가의 기획이지만, 마을의 사라짐은 개인의 기억에서 비롯된다.
수몰은 단순히 땅이 물에 잠긴 것이 아니라, 관계망과 정체성, 공동체의 뿌리까지 가라앉힌 일이다.
수몰 전후의 풍경 – 사진, 증언, 그리고 추모비
수몰 이전의 마을은 대부분 사진 한두 장, 구술 증언 몇 줄만으로 남아 있다.
‘수몰 전 사진’은 특히 이주민에게는 가장 소중한 기억의 단서다.
충주댐 사례 – “사진 속 고향”
충주댐 수몰 마을의 경우, 수자원공사와 일부 지자체에서 마을별 기록 사진을 일부 남겼지만, 대부분은 주민들이 스스로 찍어두거나, 이주 이후 간직한 흑백사진에서 발견된다.
한 어르신은 “저기 돌담 있는 집이 우리 집이었다”고 말하며 흐릿한 사진 속을 손으로 짚는다.
그런 사진에는 시간이 멈춰 있다. 벽에 기대 앉은 조부모, 마당에서 뛰노는 아이들, 정월 대보름 마을 당산제의 모닥불.
지금은 수심 30미터 아래에 묻혀 있는 장면들이다.
밀양댐 사례 – “추모비와 위령제”
밀양댐 수몰지에는 이주민들이 직접 세운 ‘수몰지 추모비’가 있다.
비석에는 “이 땅은 본래 구천리 ○○마을이었으며, 수몰로 고향을 잃은 우리 선조와 가족의 삶을 기억한다”고 새겨져 있다.
매년 음력 정월, 이주민 후손들이 모여 간소한 위령제를 지낸다. 제사상에는 밥과 나물, 그리고 마을 이름이 적힌 목패가 놓인다.
일부 마을은 비석조차 세우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재개발, 관광화, 행정통합 등으로 본래의 수몰지조차 제대로 가늠하기 어려워진 사례도 있다.
결국, 수몰지의 기억을 지키는 건 공식 기록보다 가족과 공동체의 사적 기억인 경우가 많다.
물속의 마을을 기억하는 법 – 기록과 복원의 움직임
최근에는 수몰지역의 기억을 보존하고 기록하려는 움직임이 전국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1) 디지털 아카이빙 프로젝트
국립수자원박물관과 지역사 연구소에서는 수몰 전 마을의 구술사, 사진, 이주민 인터뷰 등을 디지털화하여 온라인 전시관을 운영 중이다. 특히 충주, 합천, 안동 등 대형 댐 주변 마을은 주민 주도의 아카이빙 작업이 병행되고 있다.
‘구천리 사람들’, ‘잠긴 마을, 뜬 기억’ 등 전시 기획도 있었다.
2) 다큐멘터리와 문학 기록
영화 <물속에서 숨 쉬는 집>, 다큐멘터리 <기억의 호수> 등은 수몰 마을 주민들의 이주 전후 삶과 상실을 다룬다.
또한 지역 작가들이 수몰지를 배경으로 한 소설, 시집을 출간하며 수몰이라는 주제의 문화적 재생산이 이루어지고 있다.
3) 유적지 복원과 상징 조형물
일부 수몰지는 수위가 낮아질 때 폐가 흔적이나 담벼락 일부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를 활용해 ‘기억의 산책로’나 ‘추억의 마을터’를 조성하려는 시도도 있다.
충북 제천시에서는 구학동 수몰지를 배경으로 실향민 문화 전시관을 운영하며, 관광지와 기억의 공간을 병행하는 방식을 시도했다.
수면 아래, 잊지 말아야 할 삶
물에 잠긴 마을은 단지 사라진 동네가 아니다. 그곳은 분명히 존재했고, 누군가의 유년기였으며, 제삿날 차려졌던 상 위의 삶이었다.
우리는 관광지로만 남은 충주호, 임하호, 밀양댐 앞에서 그 이면을 함께 기억해야 한다. 아름다운 호수 사진 뒤에는 강제로 고향을 떠난 이들의 이야기가 있고, 평화로운 수면 아래에는 시간이 멈춘 마을이 여전히 살아 있다. 우리는 물에 잠긴 마을을 기억함으로써 다시 수면 위로 올릴 수 있다. 그 기억이 사라지지 않도록, 누군가는 계속 말해야 한다.
“그곳에 마을이 있었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