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가 커진다는 것은 단순히 인구가 늘어난다는 뜻만은 아니다.
확장된 도시는 주변의 논과 밭, 자연마을을 품으며 다른 삶의 방식과 공간들을 잠식한다. 그 과정에서 마을 이름은 아파트 단지명에 남고, 논과 밭은 콘크리트 바닥이 된다.
신도시, 택지개발지구, 도시계획사업.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이러한 변화들은 많은 농촌 마을을 지도에서 지워버렸다. 더는 ‘○○리’로 불리지 않고, ‘○○e편한세상’이나 ‘○○자이’로 바뀐 곳들. 놀랍게도 그곳은 불과 10년, 20년 전만 해도 모내기철이면 분주한 농촌이었다. 이번 글에서는 도시 확장에 흡수된 농촌 마을의 흔적을 추적하며, 사라진 삶의 방식과 공간, 그리고 이름만 남은 마을의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논밭 위의 신도시 – 택지개발과 마을의 소멸
1990년대 중반 이후, 수도권을 비롯한 대도시권에서는 신도시와 택지개발이 대대적으로 추진되었다.
특히 2000년대 들어 1기·2기 신도시 건설이 본격화되면서, 도심 인근의 농촌 마을 수백 곳이 도시로 흡수되었다.
대표적인 사례
경기 성남시 판교: 원래는 논과 밭이 펼쳐진 낙생·운중리 일대가 현재는 ‘판교테크노밸리’와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변모.
경기 고양시 일산: 장항·탄현·덕이 등 자연마을이 택지개발로 재편되며 현재는 일산서구의 대규모 주거지.
서울 강남구 일대: 불과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개포리, 수서리, 자곡리는 논밭과 개울이 흐르던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지금은 고층 아파트와 도심 고속도로가 그 자리를 채운다.
이러한 개발은 도시의 주거난 해소, 경제 활성화 등의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지만,
그 이면에서는 수백 년간 존재해 온 마을들이 단기간에 지워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도로명주소 체계는 새로 생겼지만,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기억은 주소에도 남지 않았다.
택지개발지구가 들어선 마을에서는 공동체가 해체되고, 마을회관·당산나무·우물 같은 생활 기반 인프라가 자취를 감췄다.
단지 지형만 유지된 채, 삶의 밀도는 사라진 공간이 된 것이다.
이름만 남은 동네 – 아파트 단지가 된 자연마을
개발이 이루어진 농촌 마을의 이름은 사라지지 않고, 어디론가 남는다. 그곳은 다름 아닌 아파트 단지 이름이다.
‘○○마을 1단지’, ‘○○자이’, ‘○○푸르지오’라는 이름 속의 ‘○○’는 대부분 그 지역의 옛 마을 이름이다.
이런 현상의 배경
개발 초기 주민 반발 최소화를 위해 기존 지명 일부 유지
토지보상 및 이주민 주택 분양 시 명칭 익숙성 유지
브랜드 이미지 + 지역성 강조로 마케팅 효과 노림
예를 들어,
서울 자곡동은 원래 ‘자곡리’로, 도시 외곽의 작은 농촌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자곡힐스테이트’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수원의 망포동은 택지개발 이전에는 ‘망월리 포동마을’이었으며, 지금은 ‘망포마을 ○단지’라는 이름만 남아 있다.
김포 풍무동도 예전에는 자연부락 ‘풍곡·무수리’였던 곳이 두 이름을 합쳐 아파트 단지명에 남았다.
하지만 이 이름들은 기억의 실체를 동반하지 않는다.
주민들은 ‘풍무지구에 산다’고 말하지만, 그곳이 왜 ‘풍무’인지, 원래 무슨 이야기가 있던 마을인지는 잘 모른다.
이름은 남았지만, 기억은 삭제된 공간.
그로 인해 아파트 단지가 된 자연마을들은, 어느새 정체성을 잃은 익명적 주거지가 되기 쉽다.
이름의 흔적은 남았지만, 그 뿌리를 기억해줄 사람도, 이야기해 줄 역사도 부족한 현실이 안타깝다.
사라진 마을을 기억하는 방법 – 지명, 표지석, 기록물
도시 확장에 따른 농촌의 소멸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사라진 마을의 흔적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은 지금도 가능하다.
주요한 기억의 방법들을 살펴보자면,
지명 표지석 설치
일부 지자체에서는 아파트 단지 한복판에 “이곳은 과거 ○○리가 있던 자리입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작은 표지석을 설치하고 있다.
예: 광교신도시의 원천동 일대, 고양시 풍산동 일대 등
마을 역사 전시관
경기도 하남시 미사강변지구에는 옛 마을 사진과 마을 구성원의 구술을 전시하는 작은 지역사 전시관이 조성되었고, 아파트 주민들의 관심도 높다.
이는 신도시 속에서도 로컬 정체성 형성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사례다.
디지털 지도 복원 프로젝트
일부 시민단체와 연구소는 옛 지도와 현재 지도를 겹쳐 보여주는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이곳이 원래 어떤 땅이었는지”를 시민이 직접 확인하고 공부할 수 있도록 한다.
대표 사례: 서울 옛지명 찾기 지도
이외에도 마을 유래지를 담은 책자 발간, 아파트 커뮤니티 공간에서의 마을 유래 교육, 지역 학교와의 협업 등 잊힌 땅을 되살리는 시도들은 계속되고 있다.
콘크리트 아래 묻힌 이름들
도시는 계속 자란다. 그 성장의 그림자 아래, 수많은 자연마을과 농촌의 기억이 사라진다. 그러나 개발이 곧 ‘지우기’여야 할 이유는 없다. 논밭이 아파트가 되고, 길이 넓어졌다고 해도 그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과 그들이 남긴 이야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가 기억하고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개포동’이 예전에는 개울이 흐르던 포구 마을이었다는 사실조차 잊히고 말 것이다.
그저 땅값과 브랜드만 남은, 정체성 없는 도시의 한 조각으로. 개발과 보존은 양립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이 동네 이름은 어디서 왔지?”라는 질문 하나에서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