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벗어나 시골길을 달리다 보면, 풀숲에 묻힌 녹슨 철길이나 폐허처럼 남겨진 작은 간이역의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언젠가 분명 기차가 멈췄고, 누군가는 손을 흔들며 이별을 나누었을 플랫폼. 하지만 지금은 역명판조차 지워져 이름도 없이 잊힌 채 시간 속에 잠들어 있다. 간이역은 산업화와 도시 확장, 교통의 고속화 속에서 하나둘씩 문을 닫았다. 그러나 그 자리엔 단지 철도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마을의 생활과 정서, 삶의 동선이 오롯이 얽혀 있었다.
이 글에서는 먼저 간이역이 어떻게 지역사회와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살펴보고, 사라진 역들이 어떤 방식으로 재활용되고 있는지의 사례들을 소개하며, 마지막으로 우리가 이 ‘이름 없는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활용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기차보다 느렸지만, 사람과 함께했던 역
간이역과 주변 마을의 생활 연결망
간이역은 말 그대로 ‘간단한 설비만 갖춘 역’을 뜻한다. 대개 승강장 하나와 조그마한 대합실, 그리고 역무원이 머무는 방 한 칸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기능은 작아도, 역할은 결코 작지 않았다. 농촌 마을의 생산물을 도시로 나르거나, 학생들이 통학을 위해 기차를 타고 내리는 출발점이었고, 편지가 오고 가는 통로이기도 했다. 심지어 역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마을이 형성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전라북도 무주군의 구천동역, 경북 의성의 탑리역 같은 곳은 인근 마을 주민들이 버스를 타기 어려운 지역적 특성 때문에 간이역이 거의 유일한 교통 수단이었다. 아침마다 주민들은 역에 모여 출근하고, 장을 보러 나가고, 멀리 사는 가족을 만나러 떠났다. 역이 곧 마을의 중심이자 공동체의 허브였다.
하지만 고속도로와 KTX가 전국을 잇고, 대중교통망이 확충되면서 느린 보통열차는 하나둘 사라졌고, 간이역은 자연스레 그 기능을 잃었다. 무인화, 폐역, 철거… 그렇게 수많은 간이역이 지도에서 지워졌다.
폐역 그 후 – 재생된 간이역 공간들
역사를 기억하게 하는 공간의 전환 사례들
흥미로운 것은, 간이역이 사라진 후에도 그 자리를 문화적으로 되살리는 움직임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오래된 간이역 건물을 그대로 살려 카페, 전시공간, 지역 커뮤니티 센터 등으로 재활용한 사례가 전국 곳곳에서 등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강원도 영월의 ‘김삿갓역’을 들 수 있다. 1990년대 폐역된 이 역은 현재 ‘김삿갓문학관’과 연결된 관광 철도역으로 리모델링되어, 지역 주민은 물론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장소로 탈바꿈했다. 역사는 사라졌지만, 공간은 살아남아 새로운 방식으로 지역과 연결되고 있다.
또한 충청북도 제천의 청풍역은 ‘청풍문화재단지’와 연계해 전시 및 체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경기도 양평의 용문역 인근 폐역 공간은 지역 예술가들의 창작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이외에도 간이역의 플랫폼만 남긴 채 산책로, 자전거길, 또는 작은 도서관 등으로 변모한 예도 많다.
이러한 공간 재활용은 단지 ‘낭만’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지역의 기억을 복원하고, 새로운 콘텐츠를 통해 다시 사람을 불러들이는 창의적인 도시재생의 한 방법이 된다. 특히 ‘철도+문화’라는 키워드는 과거와 미래를 잇는 상징적 연결고리로서 작용한다.
이름 없는 역사의 복원 –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들
공간만이 아니라, 이야기까지 복원해야 한다는 점
철길을 따라 사라진 간이역들에겐 하나하나 고유의 이야기들이 있었다. 어떤 역은 해방 이후 처음 세워진 지역 역이었고, 어떤 역은 전쟁 당시 피난민을 실어 나르던 급박한 현장이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사진 한 장 없이 기억에서 지워지는 사례가 많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남겨진 건물을 예쁘게 꾸미는 것이 아니라, 그 역이 품고 있던 이야기와 의미를 함께 복원하는 것이다. 구술 자료를 모으거나, 옛 철도 이용자들의 기록을 정리하고, 디지털 아카이브를 만드는 등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져야 한다. 간이역이 있던 마을 이름, 역에서 시작된 인연, 역무원이 남긴 손편지 같은 소소한 이야기들은 지역 정체성의 중요한 조각이다.
또한 학교 교육이나 지역 축제에서 간이역을 하나의 ‘장소 교육’으로 활용하는 시도도 필요하다. 학생들이 단지 역사적 사실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한 장소의 의미를 직접 답사하고 기록하며 스스로 지역의 역사를 재해석해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철길 끝에 남은 풍경을 잊지 않기 위해
간이역은 우리 곁에서 아주 조용히 사라졌다. 누군가에게는 매일 지나치던 공간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장소였다. 오늘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단지 ‘기차가 멈췄던 곳’이 아니라, 그곳에서 오갔던 사람들의 삶이다. 이름 없이 사라진 역사를 다시 불러내고, 그 기억을 현재의 문화와 연결해나가는 일. 그것이 바로 진정한 ‘지역의 보존’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