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지도, 지형도, 택지개발 전 토지대장을 통해 본 도시의 변천
지도를 펼쳐본다. 1970년대 1:5,000 지형도, 군용 목적으로 제작된 흑백 지도, 오래된 토지대장까지. 지도는 단지 땅의 모양을 그려낸 것이 아니다. 그 위엔 당시 사람들이 살던 마을, 논밭, 산길, 나루터, 마을 이름까지 살아 움직이듯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지도를 현재의 지도와 겹쳐보면 놀라운 사실이 드러난다. 분명히 누군가 살았던 동네가, 마을이, 이름이 지금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 아파트 단지, 도로, 공원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 속의 시간은 말이 없다.
이 글은 옛 지도를 통해 도시의 시간과 공간을 추적해보고, 개발의 흐름 속에서 사라진 동네들의 흔적을 찾아가는 작은 탐사다. 도시가 잃어버린 이름들, 묻힌 골목들, 지워진 마을을 되살리는 이 시도는, 과거의 복원이자 미래를 위한 기록이기도 하다.
지도는 기억한다 – 1970년대 지형도의 힘
1:5,000 지형도와 군사지도가 보여주는 마을의 흔적들
국토지리정보원(구 국립지리원)에서 제작한 1:5,000 지형도는 1970~1980년대 도시 확장 이전의 한반도를 매우 상세하게 담고 있다. 이 지도에는 논, 밭, 산림뿐 아니라 마을 이름, 골짜기, 고개 이름, 개울, 심지어 논의 물길까지 그려져 있어, 지금은 사라진 동네의 구조를 파악하는 데 핵심 자료로 활용된다.
예를 들어, 지금은 아파트 숲으로 가득한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일대도, 1970년대 지형도를 보면 ‘돌마리’, ‘하산운’, ‘정자동말’ 같은 자연마을이 뚜렷하게 표기되어 있었다. 택지개발 전의 지도에는 그 마을들이 논과 물길을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지금은 그 위에 정자역, 율동공원, 수내천 등이 들어선 것을 알 수 있다.
군사목적으로 제작된 흑백 항공사진 지도 역시 중요한 단서다. 비공개로 취급되던 미군의 U.S. Army Map Service 지도나 1960년대 군사도면은 당시 촘촘히 이어진 농가들과 산길, 철로, 둑길 등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으며, 현재의 도로 구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지도는 무정한 기록처럼 보이지만, 그 안엔 한 마을의 구조, 생태, 이동 경로, 심지어는 삶의 방식까지 스며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진 이 구조들은, 옛 지도를 통해 지금도 되살아날 수 있다.
지번과 동네 이름, 그리고 사라진 터전
토지대장이 말해주는 땅의 소유와 생활의 단서들
지형도 외에도, 택지개발 이전의 토지대장은 사라진 마을을 추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 장의 대장에는 소유자의 이름, 주소, 토지 용도, 경계 구분, 지목, 면적 등이 촘촘히 적혀 있는데, 이 정보를 토대로 당시 사람들이 어떤 구조 속에서 살았는지를 유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서울 강서구 방화동 일대는 과거 ‘당산말’, ‘개화리’, ‘방현마을’로 불리던 자연부락이 존재했다. 하지만 1980~90년대 공항 확장과 도시계획으로 인해 기존 마을은 철거되었고, 현재는 아파트와 고속도로 진입로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토지대장을 보면 ‘○○리 ○○번지’ 식의 기록이 남아 있고, 각 토지 소유자가 누구였는지, 어떤 용도로 땅이 쓰였는지가 명확히 나온다.
이 자료를 현재의 도로명주소 체계와 비교해보면, 과거 동네의 흔적과 흐름이 선명히 드러난다. 예전엔 개울을 따라 형성된 마을이었는데, 지금은 그 개울이 복개되어 주차장이 되어 있고, 논과 밭이 있던 곳이 아파트 단지로 바뀐 사례가 많다.
이처럼 토지대장은 ‘생활의 지도’이다. 지도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실제 거주의 흔적과 땅의 사용 이력은 대장이 알려준다. 이를 통해 과거 마을의 사회구조, 공동체 형성 양상까지도 짐작할 수 있다.
지도 겹쳐보기, 그 후 – 기록과 복원의 가능성
옛 지명과 구조를 기반으로 한 디지털 복원 시도들
최근에는 GIS(지리정보시스템)와 디지털 매핑 기술을 활용해, 과거와 현재의 지도를 겹쳐보는 연구나 시민 참여 프로젝트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예를 들어, 1970년대 지형도 위에 현재의 지도(카카오맵, 네이버 지도, 또는 고지도 서비스)를 겹쳐보면, 얼마나 많은 마을이 지워졌는지를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런 활동은 학술적 목적 외에도, 지역사회의 정체성 회복과 기억 복원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실제로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사라진 마을 이름을 복원해 작은 표지석을 세우거나, 마을 유래비를 다시 설치하는 활동도 진행 중이다. 예를 들어 부산 기장군은 옛 자연마을 지명을 복원해 관광지도에 표기하고 있고, 광주의 일부 구청에서는 폐지된 동명(洞名)을 교육 콘텐츠로 재구성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또한 민간 차원에서도 ‘옛 지명 지도 만들기’ 워크숍, 마을 답사 프로그램, 증언 기반 지도 제작 같은 활동이 늘고 있다. 이런 시도는 단지 향수적 작업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도시의 역사적 맥락을 복원하려는 실천적 접근이다.
지도는 한 시대의 공간 기억이며, 겹쳐보는 일은 잊힌 시간과 장소를 되살리는 방법이다. 특히 사라진 동네들을 아는 것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걷고 사는 장소를 어떻게 이해하고 관계 맺을 것인지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지도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할 때
한 도시의 변화를 기록하는 가장 정확한 도구는 ‘지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그 지도에서 사라진 것, 지워진 이름, 흐릿해진 경계를 우리가 다시 기억하는 일이다.
1970년대의 지형도를 들여다보고, 지금의 아파트 단지나 상업지구 위에 잊힌 마을의 이름을 다시 불러보는 일. 그것은 과거를 향한 추억이 아니라, 도시가 사람의 공간임을 되새기는 작업이다.
지금 우리 앞의 도시는 과거의 시간을 딛고 서 있다. 그러니 그 겹쳐진 시간과 지면 위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이름 하나를 찾아보는 것. 그 자체로 의미 있는 도시 산책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