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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라는 렌즈로 본 한국인의 삶

by 유익한스토리 2025. 7. 6.

인간은 하루라는 반복적인 시간을 살아간다. 아침에 눈을 뜨고, 하루를 보내고, 다시 잠자리에 드는 일상은 시대를 막론하고 지속되었지만, 그 안에 담긴 시간의 사용 방식은 시대마다 매우 달랐다.

'하루'라는 틀은 단순한 루틴을 넘어, 그 시대 사람들의 노동 환경, 사회 규범, 가치관, 그리고 권력 구조까지 비추는 렌즈가 된다. 오늘날 MZ세대가 새벽에 카페에서 노트북을 켜고 디지털 노마드처럼 일하는 모습은, 100년 전 새벽부터 공장으로 향하던 일제강점기 노동자의 하루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다.

이 글에서는 조선 후기의 양반, 일제강점기의 도시 노동자, 1980년대 산업화 시대의 직장인, 2020년대의 MZ세대를 각각 대표적 인물로 설정해, 하루 일과의 시간 배분과 노동, 여가, 휴식 방식의 변화를 비교해보고자 한다.
그들을 연결하는 것은 ‘하루’지만, 그 하루의 의미는 시대마다 전혀 달랐다.

하루라는 렌즈로 본 한국인의 삶

조선 후기 양반의 하루 – 여유와 의무 사이

조선 후기, 즉 1819세기의 양반은 지금으로 따지면 소수 특권계층이었다. 이들의 하루는 신분적 권위와 정신적 수양을 중시하는 패턴으로 짜여 있었다.

새벽 45시, 동이 트기 전에 기상해 목욕을 하고 몸가짐을 단정히 한 뒤, 고전을 읽으며 정신을 가다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이는 ‘성리학적 인간상’에 부합하기 위한 자기 관리의 일환이자, 양반으로서의 의무였다.

오전 시간은 자녀 교육, 향약(마을 자치 규범) 참여, 손님 접대, 편지 쓰기 등 사교와 행정적 활동으로 채워졌다. 점심 이후에는 독서나 시 짓기, 서예, 산책 등 비교적 여유로운 시간이 이어졌으며, 해가 지면 일찍 하루를 마무리했다.

양반층에게 노동은 육체적 노동이 아닌 정신적·문화적 활동에 가까웠다. 물론 실제로 일하지 않는 빈양반이나 가난한 사족(士族)도 많았지만, 대체로 하루 10~12시간은 ‘신분에 걸맞은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활동에 할애했다. 노동이라기보다, ‘품격 있는 삶’이 요구하는 일정한 루틴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시간을 스스로 구성할 수 있는 ‘주체성’이 있었다는 점이다. 계급적 억압이 있었음에도, 상류층은 자신이 선택한 리듬대로 하루를 살 수 있었다. 이는 이후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자유였다.

일제강점기 노동자의 하루 – 시간에 쫓기는 생존

19201930년대 일제강점기에는 농촌을 떠난 수많은 이들이 도시의 공장과 토목현장으로 흘러들었다. 이들의 하루는 생존과 착취, 그 자체였다. 특히 인천, 부산, 서울의 인쇄소·방직공장·철도현장에서 일하는 이들은 새벽 5시경 기상, 허겁지겁 도시락을 싸서 67시까지 공장으로 출근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하루 평균 10~12시간의 장시간 노동이 일반적이었으며, 휴식시간은 거의 없거나 매우 짧았다. 일터는 위생과 안전이 전혀 보장되지 않았고, 시간 엄수는 강요되었으며 지각은 곧 벌점이나 해고로 이어졌다.

퇴근 후에도 집에 돌아가면 식사 준비, 아이 돌보기, 부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가는 거의 없었고, 일요일도 종종 무급 출근을 강요당했다. 조선 후기 양반이 하루의 ‘여백’을 즐겼다면, 일제강점기의 노동자는 분 단위로 시간에 쫓기는 하루를 살았다.

이 시기의 하루는 근대적 시간 개념이 정착된 시기이기도 하다. ‘시계’가 일상을 지배하게 되었고, 개인의 시간은 점점 국가, 자본, 제국의 질서 안에 편입되었다. 하루를 주체적으로 설계하기는커녕,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 살아야 했던 시기다.

1980년대 직장인과 현재 MZ세대 – 통제에서 유연성으로

● 1980년대 직장인의 하루

산업화가 한창이던 1980년대, 도시 직장인의 하루는 국가 주도 성장 신화 속에서 과로와 경쟁에 내몰린 일상이었다.
오전 6~7시 기상, 붐비는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회사에 도착, 오전 9시부터 업무가 시작되었지만, 사실상 ‘눈치 출근’이 존재했다. 업무는 단순 반복이나 문서 작성, 거래처 대응 등 실무 중심이었으며, 점심은 짧은 식당 식사 후 재빠른 복귀가 기본이었다.

오후가 되면 피로가 누적됐지만, 퇴근은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당시 직장 문화의 핵심은 ‘야근과 회식’이었다. 상사의 눈치를 보며 남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고,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10시간 이상이었다. 회식이 잦았고, 귀가는 밤 10시를 넘기는 경우도 흔했다.

이 시기의 하루는 개인의 시간보다 조직의 시간이 우선되었던 대표적인 시기였다. 일은 단순히 생계를 위한 수단을 넘어 정체성 자체였고, ‘회사 사람=나의 사회적 인간관계’였던 폐쇄적 구조였다.

● 2020년대 MZ세대의 하루

반면, 오늘날 MZ세대는 하루를 훨씬 더 유연하고 분산된 방식으로 살아간다.
아침 7~8시쯤 일어나 커피 한 잔과 함께 스마트폰을 켜며 시작되는 하루는, 때로는 재택근무로, 때로는 공유오피스에서 시작된다.

정해진 출근시간 없이 일하는 유연근무제, 카페에서 일하는 디지털 노마드, 유튜버·디자이너·개발자 등 프리랜서로 살아가는 N잡러들도 많아졌다. 시간은 물리적으로 흘러가지만, 그것을 어떻게 채우고 설계할지는 개인의 역량과 선택에 달려 있다.

MZ세대의 하루에서 눈에 띄는 변화는 여가와 노동의 경계가 모호해졌다는 점이다. 오후에는 헬스장이나 필라테스, 저녁에는 유튜브 편집, 심야에는 사이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등 자기계발형 여가 활동이 많다. 노동시간 자체는 줄어들었지만, 자기 시간에 더 많은 목표와 생산성을 요구받는 구조다.

 

하루라는 축소판에서 본 시대의 얼굴

조선 후기 양반의 하루는 유유자적하면서도 신분의 의무를 담은 시간이었고, 일제강점기의 노동자는 분단위로 쪼개진 하루 속에서 생존을 위해 몸을 던져야 했다. 1980년대 직장인은 조직의 시간 속에 녹아들어 자기 삶을 포기했고, 오늘날의 MZ세대는 개인화된 하루를 살아가지만 오히려 끊임없는 자기 기획과 비교 속에서 피로를 느끼기도 한다.

하루는 그 자체로 사회의 축소판이다. 누가 내 하루를 설계하는가? 나는 하루를 어떻게 쓰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시대마다 달랐고 앞으로도 계속 변할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나의 하루를 돌아보는 일은, 과거를 이해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가장 좋은 출발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