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대한민국은 ‘압축 성장’이라는 말이 실감나던 시기였습니다. 국가는 수출을 중심으로 한 산업화에 속도를 붙였고, 도시 곳곳에는 공장과 빌딩이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그 번영의 이면에서 하루 12시간 이상을 일하는 직장인들, 그리고 그들을 옥죄던 수직적 조직 문화와 과로 관행이 함께 자리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1980년대 직장인의 일상을 따라가며, 당시의 전일제 업무 구조, 야근과 회식 문화, 그리고 수직적 조직문화가 고착화된 배경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한국 직장 문화의 뿌리를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9시 출근, 6시 퇴근? – 사실상 ‘12시간 근무제’
1980년대 직장인의 하루는 공식적으로는 오전 9시 출근, 오후 6시 퇴근으로 규정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하루 10~12시간 이상을 일하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대였습니다. 당시 한국은 ‘세계 공장’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수출 지향형 산업화에 전력을 쏟았고, 기업들도 ‘성과’를 위해 직원의 시간을 최대한 끌어쓰는 구조였습니다.
특히 ‘정시 퇴근’은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상사가 자리에 앉아 있는 한, 하급 직원은 절대 먼저 퇴근할 수 없었고, 회계 연말, 결산, 수출 마감 등 특정 시기에는 새벽까지 야근이 이어지는 경우도 흔했습니다. 당시를 회상하는 이들은 “퇴근은 ‘눈치 게임’이었다”고 말합니다.
게다가 타자기 업무, 수작업 문서 정리, 보고서 작성 등 당시에는 자동화되지 않은 업무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처리해야 할 작업량이 많았습니다. 컴퓨터는 1980년대 후반 일부 대기업 사무직에만 도입됐고, 대부분의 회사에서는 한 명이 타자기로 하루 종일 문서를 작성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야근보다 더 피곤한 ‘회식’ – 강제된 유대의 저녁
1980년대 직장문화의 상징 중 하나는 단연 회식입니다. 한 달에 한두 번이 아닌, 주 2~3회 회식도 흔했던 시대, 회식은 단순한 친목 행사가 아닌 상명하복과 복종을 확인하는 일종의 ‘의례’였습니다.
상사의 건배사는 반드시 따라야 했고, 고기를 먹을 때는 먼저 상사의 입에 한 점 떠넣는 ‘고기 서빙’, 술을 따르는 순서, 상사보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불문율 등 회식 자리에서조차 위계질서는 철저했습니다. 일부 직장에서는 “회식 불참 = 충성심 부족”이라는 인식이 있었고, 불참 시 인사고과에 반영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한 회식 후에는 종종 2차 노래방, 3차 포장마차로 이어졌고, 그 와중에도 상사의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 취하지 않은 척, 먼저 일어나지 않기, 분위기를 띄우기 등 수많은 사회적 압박 속에서 직장인은 그날 하루의 ‘연장전’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이처럼 회식은 단순한 문화가 아닌, 조직 충성도와 서열 유지의 수단이었고, 야근보다 더 피로감을 주는 시간이었습니다. 개인의 삶과 경계는 모호해졌고, 퇴근 이후조차 직장의 연장선에 놓여 있는 것이 1980년대 직장인의 일상이었습니다.
‘충성’과 ‘희생’이 미덕이던 수직 사회
이 시대의 직장 문화는 단지 기업 내 풍토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주도한 개발독재적 통치 방식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박정희-전두환 정권에 이르기까지 국가는 국민 개개인을 국가 발전의 도구로 간주했고, 그 속에서 ‘조직을 위해 헌신하는 직장인’은 이상적 국민상이었습니다.
그 결과 직장에서는 상사의 명령을 무조건적으로 따르고, 조직의 명분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것이 ‘충성심’으로 여겨졌습니다. 부장, 과장, 대리, 사원 등 군대식 호칭과 명령 체계, 상명하복 중심의 커뮤니케이션, 일방적 지시와 보고 체계는 당시 모든 조직에 만연했습니다.
또한 “직장은 가족”이라는 구호는 아름다워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사생활을 포기하라”는 은유였습니다. 출산휴가, 육아휴직, 퇴근 후 자기계발 같은 개념은 없었고,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조직 속에서 직장은 개인을 집어삼키는 절대 권력으로 작용했습니다.
1980년대의 이런 수직 조직문화는 이후 IMF 이전까지도 큰 변화 없이 유지되며, 지금의 ‘워라밸 결핍’, ‘회식 공포증’, ‘퇴근 후 메시지 스트레스’로 이어지는 뿌리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일터를 만든 그림자
1980년대 직장인의 하루는 단순히 바쁘고 힘든 것이 아니라, 개인이 조직에 매몰되고 자율성이 사라진 시대의 단면이었습니다. 야근과 회식, 상사의 말 한마디에 좌우되는 업무 환경 속에서, 직장은 한 사람의 전부가 되기를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시대는 지금의 기업 성장과 한국 경제의 기반을 만든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 모순된 두 얼굴 속에서 오늘의 우리는, 무엇을 계승하고 무엇을 넘어서야 할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지금의 직장인들이 정시 퇴근, 회식 거부, 유연 근무제를 외칠 수 있는 것은, 1980년대를 지나며 고통스러웠던 직장 문화가 점차 바뀌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야근이 미덕이고, 부장의 말이 법이며, 회식은 거절하기 힘든 것이라면, 우리는 여전히 그 시대의 잔재 속에 살고 있는 셈입니다.
1980년대 직장인의 하루를 돌아보는 일은 곧, 오늘의 일터를 다시 설계하기 위한 첫걸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