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민간 사회에서는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질병과 재해를 자연 현상이나 신령의 노여움으로 해석하곤 했습니다. 이 중에서도 호환(虎患)과 마마(마마·痘瘡)는 가장 무서운 존재였습니다. 범에게 물리는 사고는 대부분 죽음으로 이어졌고, 천연두는 어린아이들을 순식간에 앗아갔기 때문에, 이 두 존재는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신격화된 공포'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조선 사회에서 호환과 마마가 어떤 식으로 미신화되었고, 이를 어떻게 신앙과 공동체의 의례로 승화시켰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호환과 마마, 공포의 의인화
조선시대 사람들은 맹수나 병을 단순한 자연현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초래한 피해가 너무나 치명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호랑이에게 물려 죽는 일은 흔치 않지만, 한번 발생하면 마을 전체를 충격에 빠뜨리는 일이었으며, 천연두(마마)는 일종의 전염병으로, 아이들 사이에서 대유행하는 경우 생존율이 매우 낮았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결국 “공포를 의인화”하는 방향으로 이어졌습니다. 사람들은 범을 단순한 동물이 아닌 신령의 사자 혹은 ‘산신의 노여움’으로, 마마를 ‘마마님’이라는 존칭을 붙여 부르며 신령화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죽음과 고통에 대해 나름의 질서를 세우고 통제하려 했던 것입니다.
2. ‘호환’ – 짐승이 아닌, 하늘이 보낸 재앙
조선 시대 농촌 마을에서는 호랑이의 출몰이 단순한 동물적 위협이 아니라, 하늘이 내린 징벌이자 경고로 여겨졌습니다.
2-1. 산신의 사자, 호랑이
호랑이는 종종 산신령의 하수인으로 묘사되며, 신의 뜻을 전하는 존재로 인식되었습니다. 특히 무당들이 행하는 굿에서 호랑이는 도깨비나 귀신보다 훨씬 높은 지위를 가졌습니다. 마을에 호랑이가 나타나거나, 가축을 물어가거나, 사람을 해치는 일이 생기면 그것은 ‘산신이 노하셨다’는 징조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에 따라 마을에서는 무당을 불러 ‘산신굿’이나 ‘호랑이굿’을 지내며 그 분노를 달래고 평안을 기원하였습니다.
2-2. 호환을 부르는 ‘죄’
호환은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마을 구성원 또는 특정 가정이 지은 죄나 불경에 대한 응징으로 여겨졌습니다. 아이를 학대한 부모, 어른에게 불경한 젊은이, 정절을 잃은 여인 등이 화근이 된다는 인식이 있었으며, 이러한 믿음은 자연스레 공동체의 도덕 규범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2-3. 호환굿의 구조
호랑이굿은 호랑이를 직접 불러들이지 않고, 산신령에게 용서를 구하고 재앙을 막아달라고 기원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굿판에서는 종종 호랑이 모양의 탈이나 그림을 세워놓고, 음식과 술을 올리는 의례가 이루어졌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의식이 마을 전체의 단합을 유도하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것입니다.
3. ‘마마’ – 천연두가 아니라 신의 노여움
‘마마’는 조선에서 천연두를 뜻했습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병명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신격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3-1. ‘마마님’이라 불린 천연두
조선 사람들은 천연두를 함부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대신 ‘마마님’, ‘손님’, ‘귀하신 분’ 등 존칭을 써서 병을 인격화했습니다. 병이 몸에 들었다는 것은 그 신의 방문으로 여겨졌고, 이를 함부로 대하면 더 큰 화를 입는다고 믿었습니다. 특히 어린아이가 천연두에 걸리면, 그것은 아이의 운명이라며 받아들이되, 마마님이 노하지 않도록 조용하고 극진히 대접하는 것이 중요한 태도였습니다.
3-2. 마마굿과 부정금기
마마가 한 아이에게 들면, 그 집에서는 며칠간 외부인 출입을 철저히 막고, 소란을 피우지 않으며, 고기를 먹지 않고, 조용히 기도하는 분위기를 유지했습니다. 무당은 마마굿을 통해 신의 노여움을 풀고 아이가 병마를 이겨낼 수 있도록 빌었습니다. 이 굿은 단순히 치유가 목적이 아닌, '관계 회복'의 의미였습니다. 즉, 병이 아니라 병의 ‘주인’에게 잘 보여야 병이 물러난다는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4. ‘마마님이 노하신다’는 말의 유래
“마마님이 노하신다”는 표현은 아이가 울거나, 말을 듣지 않거나, 나쁜 짓을 하려 할 때 흔히 쓰이던 말입니다. 이는 단순한 훈육의 수단이 아니라, 천연두를 신격화한 ‘마마님’의 존재를 아이에게 내면화시키는 방식이었습니다.
조선시대 민가에서는 아이가 천연두를 앓지 않았을 경우, 언제 찾아올지 모를 ‘마마님’을 대비해 특별한 의례를 행하곤 했습니다. 마마가 찾아왔을 때는 무당을 불러 ‘마마굿’을 하고, 마마가 지나간 후에도 탈상(脫喪)과 같은 사후의례를 치르며 예우를 다했습니다. 마마를 ‘두려운 신’이 아닌 ‘노여움을 달래야 할 존재’로 인식한 것이지요.
5. 마마굿과 마마신앙의 구체적 행태
천연두는 감염 경로와 치료 방법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신의 뜻으로 인한 병이라 보았습니다. 따라서 치료의 방식도 의학이 아닌 무속적인 방법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마마굿입니다.
5-1. 마마굿의 절차
마마굿은 무당이 중심이 되어 행해지는 제의로, 집안에 천연두가 돌거나 아이가 마마에 걸렸을 때 거행되었습니다.
무당은 마마신을 모시는 굿상을 차리고, 마마님을 모셔오기 위한 노래와 춤을 합니다.
굿 중에는 마마를 화나게 하지 않기 위한 정중한 언어와 의례가 반복됩니다. 마마님 앞에서는 소리 높이지 않고, 깨끗한 복장과 단정한 자세를 유지해야 합니다.
마마굿을 할 때는 “마마님, 노여움을 거두소서”라는 식의 경어체와 청원문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며, 어린 아이의 건강을 빌었습니다.
5-2. 음식과 공양물
마마님에게는 주로 부드러운 떡, 술, 생선, 나물 등을 공양물로 바쳤습니다.
특히 흰색 떡과 맑은 탕은 ‘깨끗함’과 ‘정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아이의 체온을 낮추는 데도 실용적인 효과가 있었습니다.
6. 범굿과 호랑이 신앙
호랑이는 조선 후기까지도 시골 지역에서는 빈번하게 출몰하던 맹수였습니다. 산촌에서는 산신의 사자 또는 산을 지키는 수호령으로 여겨졌으며, 범에게 죽은 사람은 ‘범신에게 잡혀간 것’으로 해석되곤 했습니다.
6-1. 범굿의 사례
호랑이에게 사람이 물려 죽은 경우, 이를 단순 사고가 아닌 신의 노여움으로 간주하고, 범굿을 열었습니다.
범굿에서는 죽은 자의 혼을 달래는 동시에, 산신과 호랑이에게 화해와 사과의 제의를 드립니다.
‘호랑이 할아버지’, ‘범대신’ 등으로 호칭되며, 굿은 마치 존귀한 신을 대접하듯 진행됩니다.
6-2. 범신을 모시는 신당
일부 지역에서는 아예 범신을 모시는 작은 사당을 지어, 주기적으로 제를 올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장소는 대개 산 입구나 마을 어귀에 위치하였고, 범이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상징적 공간으로 여겨졌습니다.
7. 질병과 공포에 대한 공동체의 대응 방식
조선시대 사람들은 개인의 고통을 공동체적 의례로 승화시켰습니다. 누군가 병에 걸리거나 사고로 죽음을 맞이했을 때, 그 사건은 단지 그 집안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온 마을이 함께 참여하여 굿을 열고, 재를 지내며, 공포를 나누는 방식으로 견디고 치유하였습니다.
7-1. 마을 단위의 굿
천연두가 한 마을에 퍼졌을 때, 개별 집안의 굿만으로는 부족하다 판단되면 동제(洞祭) 형식으로 마을 전체가 굿에 참여하였습니다.
마을 어귀에서 동신제를 지내고, 마마와 호환의 신을 함께 달래는 의식을 거행하였으며, 이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빌기 위한 행위였습니다.
7-2. 아이들 중심의 신앙 문화
특히 아이들이 많이 죽어나가던 시기에는 ‘세 살까지는 하늘 품에 있다’는 말처럼, 어린 생명은 늘 불안정한 존재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호랑이 무늬 옷을 입히고, 마마굿을 사주고, ‘장수금’이라 불리는 작은 부적을 달아주는 등의 보호 행위가 행해졌습니다.
8. 현대적 시사점: 질병과 재난의 문화적 수용 방식
오늘날 우리는 코로나19나 원인 모를 전염병 등을 겪으며, 조선 시대의 사람들처럼 공포를 해석하고 견디는 방식을 다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과학이 발전한 지금도 공포는 단지 논리로 극복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호환·마마에 대한 조선인의 대응 방식은 ‘미신’이 아닌 문화적 방어기제로서 되돌아볼 가치가 있습니다.
'마마님과 범신'을 기억한다는 것
질병과 죽음을 의인화하고, 신으로 대접하며 달래려 했던 조선인의 지혜는 단지 어리석은 미신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위한 문화적 노력이자, 공포를 마주한 공동체가 서로를 지탱하기 위해 마련한 안전망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마마님이나 호환신을 모시지 않지만, 그 당시 사람들이 나눈 두려움과 위로, 공포와 해석의 언어를 잊지 않는다면, 인간의 삶에서 재난을 대하는 태도 역시 더욱 깊이 있게 성찰할 수 있을 것입니다.